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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인물

이수흥 - 제2의 안중근을 희망한 독립투사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 정보 제공
제목 이수흥 - 제2의 안중근을 희망한 독립투사
이천이 낳은 독립투사 이수흥李壽興 의사는 본관이 연안延安이며, 이천읍 창전리 동촌에서 1905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출생 시기는 바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해오던 시기로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한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였다.

이수흥의 학력은 매우 짧아서 11세가 되던 1915년에 일제가 운영하던 이천공립보통학교(현 이천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약 2년간 다니다가 자퇴한 것이 전부였다. 이후 그는 친아버지를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사춘기 시절 가정사로 인한 어려움도 겪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14세 되던 1919년 부친이 서울로 이사를 하였고 부모가 이혼 하는 등 가정형편이 순탄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수흥은 승려가 될 결심을 하고 출가하여 2년여 동안 수도 생활을 하였다. 이때 몸담았던 사찰이 백사면 원적산에 있는 영원암이다. 부친의 간청으로 하산하였으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수흥의 독립운동은 그가 19세 되던 1923년 만주간도로 망명하여 당시 김좌진장군이 운영하던 신명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이후 그의 일생은 민족을 위한 헌신으로 일관된다. 그해 8월경에는 만주지역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당시 통의부 총장이었던 채상덕의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 부대인 육군 주만참의부에 가담하여 특무정사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의 애국활동은 국내로 잠입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1926년 5월 국내에 잠입한 이수흥 의사는 군자금 확보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는데, 우선 찾아간 곳이 황해도 평산에 사는 김상렬·함성호였다. 이들을 만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해 7월 10일 서울 동소문혜화문을 달리 이르던 말 파출소를 습격하여 일경 덕영승차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 수원으로 피신하였다가 같은 해 9월 7일에 고향 친구였던유택수와 함께 안성의 은행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키로 합의하고 안성에 도착하였으나 마침 일요일이라 거사가 불가하였다. 이에 안성의 부호 박승육의 집을 찾아가 장남인 박태병에게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사살하고 60원을 강탈한 후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9월 25일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에 거주하는 이민응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0월 20일에는 백사면에 위치하고 있던 식산회사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현방 경찰주재소가 있음을 보고 먼저 주재소를 습격한 후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 송천의를 사살하고 이후 수원으로 몸을 피해 은신하였다. 한편, 유택수는 10월 27일 서울 수은동의 대성호 전당포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마련코자 하였으나 전당포 주인 전기영을 사살하였을 뿐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때 부친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에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이천으로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일제는 이수흥 검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천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4대 사건의 주인공인 이수흥 의사를 체포하려 혈안이 되었는데, 무려 무장경찰 300여 명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이수흥의 신장이 매우 작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관내에 거주하는 모든 남자를 수색하였다. 그러던 중 현상금을 노린 친척의 밀고로 11월 6일 다른 친척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이수흥은 3년에 걸친 긴 취조를 받고 1928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국체변혁죄, 총포화약취체령 위반죄 등이었다. 7월 10일 형이 선고되었는데 유택수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재판 중에도 “안중근 선생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을 본받고 싶었다.”“ 내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대관을 암살해서 국체를 변혁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당당히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형언도를 받고도 항소하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 사형선고 후 항소하지 않은 사례는 이수흥 의사를 비롯하여 강우규와 허위 등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수흥은 1929년 2월 27일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김구와 함께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에 몸담았던 삼균주의자(三均主義者) 조소앙은 『 이수흥·유택수전』을 지어 민족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를 기리었는데, 특히 이수흥의 의거를 ‘국내 4개월 대전’이라 칭송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이천시 창전동 이천초등학교 앞에 주먹을 불끈 쥔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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